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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가 시를 썼던 시대인 1936~19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하던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 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급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역사 중 사람의 생명이 가장 값싸게 거래되었던 시대였고 자유·평등·박애가 군국주의의 넝마주이 집게에 집혀서 오물 처리장으로 실려가던 때였다. 철학자에게는 복종의 철학이 강요되고 음악인에겐 군가 작곡이 명령되며, 시인에게는 원고지와 펜으로 탄환을 만들 것을 강요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엔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었고 친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하물며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 옷'과 '살구나무'와 '희망의 봄이야 영락없는 볼온제품이었다.

     

     

    1940년 전후-지구는 군가와 화약 냄새로 가득 차서 모든 약소 민족은 게슬러 총독 아래서의 윌리엄텔처럼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사과를 겨누고 있었다. 1876년 이후 유럽 열강과 미국은 매년 24만 평방마일의 땅을 얻어 왔다. 그 결과 1914년에 이르자 지구상엔 거의 모든 약소민족이 어느 강대국의 한 식민지로 변하고 말았으며, 이것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학은 본의든 아니든 식민 종주국의 이익을 옹호하든가 아니면 민족 독립운동을 돕든가 둘 중 하나에 봉사하게 된다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야만 했다. 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질적인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탬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시인 윤동주는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학자 이윤재와 시인 이육사후로로 그리고 윤동주를 함흥과 북경과 후쿠오카의 옥중에서 잃었다.

     

     

    고문·영양실조·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동주도 1943년 7월, 체포 이후 1945년 2월 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이 시인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이후 월 1매의 엽서 쓰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가 형페이 확정된 때로, 그 이전엔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나 독서가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물은 아직도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최후의 순간에 큰 소리를 치며 죽었다는 간수의 증언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 모국어의 순수 시인이 우리말로 고함 지르고 죽은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간수에게 일어로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을까!

     

     

     

     

     

     

     

    윤동주 시집

     

    윤동주(지은이) 범우사

     

     

    흔히들 시인 윤동주를 저항 시인이라 부른다. 원래 저항이란 순수예술의 한 속성이 된다. 일반적으로 저항예술과 순수예술을 이원론 조절적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이 최근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데, 예술이란 그 순수성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저항임을 수긍해야 될 것이다.

     

     

    예술적 창조란 말할 필요도 없이 개성의 표현이다. 이 '개성'이란 곧 타이Nangrograng 조화와 갈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는 바로 '자기 개성'의 모든 반대자에 대한 조화를 위한 저항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순수예술의 본질이 된다.

     

     

    따라서 저항은 고대 원시예술의 시발점부터 순수예술이 지닌 한 속성이 되어 왔다. 즉 자연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 동굴의 벽화로부터 종교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르네상스 시대, 이어 권력과 사회에 대한 근대적 예술과 비인간화해 가는 과학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현대예술로 면면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서의 저항의 문학이 1940년대 암흑기의 한국에서도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윤동주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위에서 본 저항문학의 주제에 의한 분류와는 달리 이를 문학인의 기능이나 대사회적 자세로 나누어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를 보게 된다.

     

     

    첫째는 문학인 자신이 단체나 결사 등에 직접 가담하 는 경우로, 이때 그 문학인의 작품은 오히려 매우 서정적일 수도 있다.

     

     

    둘째는 일시적인 의무나 지원 세력으로 어떤 단체나 운동에 뛰어든 경우가 있다.

     

     

    마지막 셋째는 직접 운동권에 가담하거나 지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정서적인 저항을 시도 하는 예가 있다.

     

     

     

     

     

     

     

    이런 세 가지 형태의 저항적 자세는 세계문학사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짧은 문학사에서도 첫 번째에 해당하는 여로는 이육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지하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서정적인 작품을 남긴 좋은 본보기가 된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이상화·한용운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윤동주나 김소월과 같은 시인으로, 자칫하면 이런 시인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묵과해버릴 수 도 있을 만큼 그 작품은 깊은 서정과 민족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윤동주에게 왜 윤봉길이나 안중근처럼 되지 못하고, 아니 하다못해 이육사처럼 비밀결사에라도 참여하지 못했느냐는 추궁은 할 수 없으며, 이런 시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평가하는 겸허한 자세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옥사탕죽 그 자체가 윤동주의 시문학 전체를 대변해주는 것으로, 그의 순수한 시가 곧 역사적 저항의지의 표현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인류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짜르 치하에서 가장 찬연했던 문학이 창조되었듯이, 1940년의 혹독한 식민 통치 아래서 우리의 순수 저항시는 태어났던 것이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저항시는 진정한 영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만이 아는 순수한 고뇌의 절규가 스며 있으며, 그 끝간 데 모를 고뇌의 깊이 속에 '순수 저항 시'의 참된 가치가 스며 있다. 이런 시는 누구를 선동하지는 않으나 감명을 주며, 울리지는 않으나 가슴을 찌르며, 취하지는 않으나 각성제일해치가 된다.

     

     

    윤동주의 저항시도 바로 이런 각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원하는 삶의 최소공약수를 빼앗긴 시대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혁명이니,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어마어마한 이상들은 내일의 시인에게 남겨두고서 그는 오직 하나의 평범한 약소 민족의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 평범한 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별과 어머니와 소녀와 서정 시인을 그리며 살고자 하는 꿈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는수 없이 저항 시인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윤동주의 이런 순수한 약소 민족의 서정적인 삶의 추구 자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장 쉬운 해답을 우리는 멀리 북간도에서 찾을 수 있다.

     

     

    1886년, 중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 간 윤동주는 그짧은 생애 중 모국이라고는 학창시절 4~5년 정도밖에 있어 보지 못한 영원한 방랑자였다.

     

     

     

     

    새봄이 다 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님

     

    가을밤 웅신까지

     

    또 어찔 참을래요

     

    두만강 눈 얼음은

     

    다 풀리어 간다는데

     

    새봄은 아니오라

     

    열세 봄 넘어와도

     

    못 참을 나랴마는

     

    가신 님 날 잊을까

     

    강남의 연자들은

     

    제집 찾아 다 왔는데

     

    -간도 이민 민요<기다림>

     

     

     

     

     

     

    기온의 차이가 극심한 대륙, 근대 이후 배일사상의 온상지였던 땅, 일본력이 아닌 단군 기원을 공공연히 사용하며 헌옷을 입고추위에 동포들이 떨며 청국인 지주와 일본 군인들에게 이중으로 혹사당하던 원한과 설움과 서정과 꿈과 웅지의 옛 땅

     

     

    - '총독부 문서 1912년 청국 국경 부근 관계 사건철'에는 간도로의 조선인 이주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토지가 비옥해서 생활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가는 것, 항일 및 망명 이주, 기독교 연구 전과 등등.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고 전하는 윤동주는 이런 독특한 환경 속에서 민족 고유의 순수한 정서를 그리워하면서 자라났을 것이며, 특히 문학청년 시적에 백석의 <사슴>을 통하여 한민족의 서정을 익혔기 때문에 나중 일본에 가서도 민족 정서를 잊을 수 없었으리라.

     

     

    이처럼 행동적 저항보다 순수한 민족 정서로서의 저항 시인인 윤동주는 시를 통하여, ① 조국 만가와 조국 부재의식 ② 민족적 피해의식 ③ 민족적 저항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이 세 가지는 다 민족적인 정서의 순수 저항으로, 독립이나 조국에 대한 열망에까지 확대 해석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 <바람이 불어>에서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별 헤는 밤>에서

     

     

     

     

    위의 인용에서처럼 시인 윤동주는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하늘의 별을 헤일 수 있는 약소 민족의 이방인의 한 민감한 청년으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너무 도식적으로 해석하여 '흰 옷'은 민족의 저항을, '봄'은 해방을 상징한다는 식의 풀이는 비리야 할 것이다.

     

     

    이런 단견적인 비평은 자칫하면 우리의 민족이 지닌 보다 근원적인 정서의 저항성을 속류화(유출산시킬 소지가 없지 않다. 따라서 윤동주가 지닌 시세계에서의 저항 의식은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북간도 이주민의 윤택하지 못한 생활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민족 정서의 한 영역을 확보해주었다. 시계도 없는데 애기가 울어서 새벽을 안다는 <애기의 새벽> 이나, 장에 가는 엄마를 내다보려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을 쏘옥쏘옥 뚫는 <햇빛·바람> 등은 평범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소년적 정서를 잘 전해주고 있다. 또 프랑시스 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당나귀와 시골 풍경의 차분한 묘사는 북간도의 추위를 녹여주는가작들이다.

     

     

    특히 이와 같은 생활적인 서정시 속에서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될 점은 그의 시 속에는 감상적인 요소는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가 아닌, 생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자세가 스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년적인 정서의 탈을 벗고 보다 민족적 정서의 원천적인 시로서의 저항의 세계로 돌입하는 모습이 다음에 나타난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무서운 시간>에서

     

     

     

     

     

    이런 자괴와 겸허 속에서 이 시인은 민족의 슬픔을 깊숙이 맛보며 현실과의 대결에서도 항상 자상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럽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라고 하면서도,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로 '나팔소리 들려옴' 새벽과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릴 날을 기 다리면서 지조 높은 개가 어둠을 짖는 소리를 들으며 짧은 생을 끝냈다.

     

     

    이처럼 동주의 시는 간도로 간 조선인의 정서와 식민지 조선인의 서정을 노래한 것으로, 그 저항의식을 나타냈다. 그의 저항시가 가진 특징 중 우리가 지적하고 넘어가야할 것은 기독교와 관련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크게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점과 복고주의적인 정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기독교는 물론 우리나라 민족의 저항세력에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민족적 전통의 정서와 많은 갈등을 겪어 왔는데, 윤동주는 이를 극복하여 종교 보다 민족 정서를 우위에 둔 훌륭한 시인이었다.

     

     

    또 복고주의 역시 간도로 이민간 사람들 속엔 상당히 간직되었고 당시의 군국주의적 식민지 치하에서도 공공연히 자행되었건만, 이를 극복하고 새 시대의 민족적 정서를 노래해주었다. 그러기에 윤동주의 시가 오늘의 독자에게도 신선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윤동주 서시 시집 소개

     

     

    그렇다면 윤동주의 시와 그의 저항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까.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저항의 자세 중 순수한 서정적 작품으로 저항을 시도한 이른바 예술적 저항의 시인으로 서 한 표본을 이룬다.

     

     

    이런 계열에 속하는 다른 시인으로는 김소월을 들 수 있는데, 윤동주는 소월에 비하면 보다 진한 저항의 체취가 묻어나온다. 다만 민족적 공동운체로서의 정서는 소월이 단연 으뜸이다.

     

     

    원래 예술에서의 저항이 가장 전염력이 강하려면 서정성을 지녀야 되는 것이다. 흔히들 전투적 선동성을 저항 문학의 제일로 삼는 예가 있으나, 대중적 내지 민중적 저항의 유발엔 짙은 서정이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코자크 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쇼팽의 피아노를 박살내어 땔감으로 쓴 것은 가냘픈 그의 음악이, 그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폴란드인에게 애국심을 강력히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윤동주가 오늘의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호소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의 서정성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민중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에 많은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임헌영(문학평론가)

     

     

     

     

     

     

     

     

     

     

    윤동주 시집 저자 소개

     

     

    尹東柱. 1917~1945. 일제강점기 저항(항일)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아명은 해환(海煥). 해처럼 빛나라는 뜻이다. 열다섯 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초 한 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 「빗자루」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작품으로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유작 「쉽게 쓰여진 시」는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가, 사후에 그의 뜻대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29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다.